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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에 대하여

앤이룸 2014. 6. 27. 15:50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지금의 서울 초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정과 어머니 변씨 부인은 순신을 매우 엄하게 가르쳐 이순신은 잘못된 행동을 하는 친구나 건달들을 보면 무조건 바로잡았다.

이순신은 12살때 부모님을 따라 충청도 아산의 외가가 있는 뱀밭골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다.

순신을 어릴때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지혜로워 늘 전쟁놀이에서 승리를 했지만 나이가 들자 자신이 좋아하던 전쟁놀이를 그만두고 글공부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순신은 글공부를 하면 과거에 급제하지만 벼슬을 해도 당파 싸움에 휘말리면 뜻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외적들을 무찌르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순신은 무과 시험을 준비하였다. 낮에는 활쏘기, 말타기, 칼쓰기를 익히고, 밤이면 군사를 다루는 병법에 대한 책을 읽었다. 1572년 스물여덟 살이 된 이순신은 무과 시험을 보기 위해 한성으로 올라가 무과 시험을 보았다. 이순신은 활쏘기, 칼쓰기, 창던지기에서도 모두 1등을 했지만 말타기, 말 위에서 여러가지 재주를 부리고 장애물을 뛰어넘는등 실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말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려 이순신은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버드나무 나뭇가지로 다리를 동여맨 후 말을 타고 끝까지 달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의 굳센 의지와 용기를 칭찬했다.

이순신은 말타기로 인해 시험에서 떨어졌지만 4년뒤에나 열릴 시험에 다시 참여하여 당당히 합격했다.

무과 시험에 합격한 이순신은 함경도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권관이라는 벼슬을 거쳐 1580년에 전라도 발포라는 것의 수군 수비 대장인 만호가 되었다. 이순신은 배 타는 법법, 바다에서 싸우는 법, 배 만드는 법 따위를 열심히 공부했다.

또한 이순신은 높은 사람의 명령이라도 옳지 않은 일이면 결코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강직한 성품 때문에 이순신은 높은 벼슬아치들의 모함을 받아 만호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봄 북쪽 국경 지방에 여진족이 쳐들어 왔지만 나라에서는 이용을 북방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용은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순신을 부관으로 데려가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순신은 그 공으로 1587년에 함경도 땅 두만강 어귀에 있는 녹둔도라는 섬의 둔전관이 되었다. 이순신의 군사들의 수가 너무 적었기에 이순신은 이일에게 군사를 더 보내달라고 하였지만 이후 소식이 없었다.

여진족이 국경 마을에 또다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여진족을 무찔렀지만 자신의 군사도 10명이 죽고 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다. 이일은 이순신에게 군사를 보내지 않은 것을  나라에서 알면 큰 벌을 받을 게 뻔해 모든 잘못을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웠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벌을 받았지만 이후 여진족이 다시 쳐들어왔을때 큰 공을 세워 억울한 백의종군에서 벗어났다.

1589년 백의종군에서 풀려난 이순신은 전라도 정읍 고을을 다스리는 현감으로 가시 벼슬길에 올랐다. 이순신의 그 마을의 백성의 억울하거나 그동안 겪었던 어려운 일을 해결해 주자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이웃 고을인 태인의 현감도 맡으며 어진 정치를 펴 나갔다.

그 무렵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 나라와 명나라를 침략하기로 마음먹고 전쟁준비를 했다. 이때 선조 임금은 황윤길과 김성일을 일본에 보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셈을 알아보려고 했다. 김일성과 황윤길이 곧 쳐들어올것 같아 서둘러 대비해야 할 것 같다는 것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감히 우리나라를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문제를 놓고 당파 싸움을 벌였다. 이처럼 조정의 대신들이 당파 싸움에 정신이 팔려 있을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많은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새로운 무기도 만들었다. 선조 임금과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좌수사를 맡겼다. 이렇게 이순신은 무과 시험에 급제한 지 15년 만에 전라 좌수사라는 큰 임무를 맡게 되었다. 1591년 전라 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내려갔다. 여수의 군사들은 훈련도 잘 되지 않고 배는 너무 낡아 바다에 뜨지도 않을것 같았으며 무기는 죄다 녹슬어 있었다. 이순신은 불호령이나 호되게 곤장을 치기도 했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때릴때 마음이 아팠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군사들은 날로 솜씨는 늘어났다. 수군에게 배는 목숨과 같았으므로 낡은배를 고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오랫동안 배를 탄 군사들, 나이많은 어부들을 따로 불러 배 겉에 두꺼운 철판이 있고 노가 많이 붙어 있으며 큰 못이 촘촘히 박아져 있는 거북선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온 세계가 배를 나무로밖에 만들 줄 몰랐던 시대에 처음으로 철갑선을 만든것이다. 1592년 4월 마침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몇 차례로 나누어 우리 나라로 보냈다. 맨 먼저 고시니 유키나가가 이끄는 2만여 명의 일본군이 신식 무기인 조총을 앞세우고 부산진으로 쳐들어 왔다. 정발은 일본의 '우리는 조선땅을 거쳐 명나라로 가려고 할 뿐이다' 라는 핑계에 조선땅을 지나가고 싶거든 나를 죽이고 가라고 하였다. 일본군은 부산진을 손에 넣은 후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으로 쳐들어 갔다. 송상현은 싸움에서 패배했다. 동래성까지 빼앗은 일본군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재물을 빼앗았다. 1592년 5월 4일 새벽 드디어 이순신은 배 80여 척을 이끌로 수십 척이나 되는 배와 일본군을 물리쳐 많은 무기와 곡식을 빼앗았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우리 나라가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옥포 해전이다. 5월 29년 이순신은 경상남도 사천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깊은 바다로 꾀어낸 뒤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했다. 또한 6월 2일에는 제 2차 당포해전 대승첩을 했고 7월 8일 제 3차 한산도 대승첩-<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히 소탕했다. 1593년 8월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한산도에 수군 본부를 설치하고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비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명나라와 전쟁을 그만두자는 협상을 시작했다. 1596년에 일본은 다시 전쟁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을 흉계에 빠뜨릴 궁리로 '일본군 대부대가 거제도로 상륙할 것이다' 라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조정에서는 이 말을 믿고 이순신에게 거제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이순신은 거제도로 가지않았다. 일본군은 고제도가 아닌 다대포로 쳐들어왔다. 그러고는 다시 간첩을 보내 '이순신이 일본군을 막지 않았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렇게 이순신은 벼슬에서 쫓겨나 한성으로 끌려가 1597년 2월 이순신이 쉰 세 살 때의 일이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으로 없는 사이 경상 우수사 원균이 삼도 수군 통제사를 맡았다. 그러나 원균이 이끄는 우리 수군은 1597년 7월, 가덕도 싸움과 칠천량 싸움에서 일본군에게 아주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우리 수군은 원균을 비롯해 많은 장수들이 죽고 배도 거의 다 망가져 버렸다. 그래서 다시 이순신이 1597년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닌 젊은 사람들만 뽑았다. 군사로 뽑시지 못한 사람들은 울면서 이순신에게 울면서 매달렸다고 한다. 이순신의 군사는 120여 명 밖에 없었고 배는 12척뿐이었지만 130여 척이나 되는일본군 함대를 통쾌하게 무찔렀다. 1598년 2월 명나라에서는 뒤늦게 진린이 이끄는 수군 5천 명을 우리나라로 보내왔다. 우리 수군은 명나라와 힘을 합쳐 일본과 싸웠다. 그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병으로 죽자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고 서둘러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이순신의 무리가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기에 섣불리 바다를 건널 수 없어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서는 무려 500여 척이나 되는 일본군 배가 모여들었다. 이에 비해 우리 나라와 명나라의 배는 모두 합쳐서 200여 척밖에 되지 않았다. 그라나 이순신은 이번 싸움이 일본군을 무찌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고  조선의 수군들과는 싸워 이길 수가 없었다. 이순신의 용맹 앞에 일본군은 폭풍 속의 갈대처럼 쓰러져 갔다. 하지만 달아나던 일본군 배에서 날아온 총알이 이순신의 가슴을 궤뚫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자신이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간단히..

 

 

출생 1545년 4월 28일 한성부건천동(서울 인현동)에서 부친 덕연군 이정의 사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어남 .

(※ 모친 초계(草溪) 변씨의 꿈에 시부 (媤父)가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귀인이 될 것이니 이름을 순신이라고 하라"고 한 이조 (異兆)가 있어 그대로 명명)

병정놀이 꼬마 대장이 된 순신은 책에서 읽은 작전을 병정놀이에서도 적용함 "오늘은 새로운 작전을 지시하겠다. 공격하는 적군은 윗마을 병사들이 맡고 수비는 아랫마을 병사들이 한다. 수비하는 병사들은 반으로 나눠 따로 진을 치도록 하겠다" "수비하는 반은 나무 뒤에 진을 치고, 그 나머지 반은 저 아래쪽 개울가에 진을 친다. 그러면 반드시 이길수 있을거야 뒤에 개울이 있어 뒤로 절대 적군이 쳐들어 올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배수의 진'이라는 거야. 강이나 바다를 등지고 치는 진으로 옛부터 많은 승리를 거둔 작전이다"

 


문무를 두루 갖춤.
순신은 글공부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무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하고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 왜적들로부터 부모와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여 군사에 관한 책을 읽을 뿐만 아니라 말타기 연습,활쏘기,칼쓰기, 창쓰기를 계속해서 익혀 나감.

말위에서 떨어짐
- 순신은 나이 28세 무과시험장에서 활쏘기,칼쓰기,창쓰기시험을 치루고 마지막 시험인 말타기를 할 때 흙먼지를 일으키며 멋지게 달려가던 말이 발을 헛디뎌 이순신을 내동댕이 쳤다.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곁에 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꺽어 그 껍질로 다리를 감아 매고 곧바로
말을 잡아 타고 다시 달렸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진 사고로 과거에는 낙방함)

이 충무공 (1545 - 1598)
- 휘(諱)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 , 본은 덕수(德水)
충무는 1643년(인조 21년) 공이 순국후 내린 공의 시호(諡號)임.

증직 과 추증

- 선조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증직(贈職)
- 정조는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음.

- 32세 : 함경도에 초급장교인 권관(權管)으로  임명됨
                (국경경비)
   - 36세 : 전라도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임명 (포구 수비)
   - 38세 : 만호에서 파직당함(시기하는 무리때문에 모함으로)
   - 39세 : 복직되어 함경북도 권관으로 근무, 호적(胡賊)의
               괴수(魁首)  울지내를 사로잡아 양민을 보호함.
   - 42세 :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됨
   - 43세 : 록도둔전(鹿島屯田)을 관리하는 중에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여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좌고(座股)에
               상처를 입었으나 도리어 모함을 받고 투옥됨

 

  - 45세 : 전라도 정읍현감에 태인관을 겸함
   - 47세 :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  장차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직감하고 권한과 범위내에서 전쟁준비에 열중하심.
   - 48세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 5월 07일 : 제1차 옥포해전 대승첩(對勝捷)
     ▷ 5월 29일 : 경상도 사천에서 승첩
     ▷ 6월 02일 : 제2차 당포해전 대승첩
     ▷ 7월 08일 : 제3차 한산도대승첩- <학날개 전법> 서해로 가려는 왜적들을 완전소탕.
     ▷ 9월 01일 : 제4차 부산대승첩
  - 49세 :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임
  - 50세 : 전염병으로 십여일이나 고통을 당함
  - 52세 : 적군의 음모와 원균의 시기로 서울로 압송
  - 53세 : 정탁(鄭琢)의 상소문이 주효하여 석방, 백의종군함 다시 통제사로 복직,
              여병(余兵) 백여명과 12척의 전함으로  결사항전하기로 맹서함.
     ▷ 9월 16일 : 명량해전대승첩,울독목에서 30척 격파
  - 54세 : 1598년 8월 17일 풍신수길이 죽으매 왜적의 철군 시작
     ▷  왜함 500여척을 추격하여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음.
     ▷  11월 19일 -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탄환을 맞아 전순(戰殉)하심,
          임종시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난 뒤에 발상(發喪)이 마지막 격전으로 적은
          크게 패하여  500여척의 전함중 겨우 50 척만이 남해로 달아나 7년간의
          임진란이 종식됨.